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스니아 전쟁 (문단 편집) === 뒤집힌 전황 === 전쟁이 시작되자, [[1992년]]부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 [[NATO]] 가입국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단계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신 유고 연방에겐 경제 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심지어 [[UN]]에서도 신 유고 연방에 대해 사실상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면서[* UN은 유고슬라비아의 회원국 지위를 말소하고 대신 구 유고에서 독립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를 모두 신생국 자격으로써 UN 회원국으로 받아줬다. UN은 신 유고 연방에 대해서도 신생국 자격으로 UN에 가입할 것을 내걸었고, 이는 신 유고 연방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후계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정통성을 부정당한 신 유고 연방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UN 회원국 지위 박탈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박탈이나 다름없었다. 신 유고 연방은 [[코소보 전쟁]]이 끝난 2000년에 신생국 자격으로 UN에 가입했다.] 세르비아를 비롯한 신 유고 연방은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인 차질과는 별개로, 당시 서방이 가했던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금수조치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밀수]], 밀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당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자행하는 전쟁범죄와 학살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르비아 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경제 봉쇄를 통한 압력보다는 외교적 방법으로 전쟁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서방의 경제적 제재를 반대하는 등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단순히 태평한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민주화 이후 급속한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지하경제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도 월급액수가 적던 상황이다보니 지하경제 융성에 대해 단속조차 하지 못했다. 헝가리도 이보다는 상황이 조금 낫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러다 보니 밀무역이 이루어져도 약간의 뇌물로 해결이 가능했고, 밀무역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물론 물가상승 문제는 세르비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물가상승이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던지라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르비아도 급속한 물가상승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특히 1994년 1차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정도로 물가상승률이 너무 높아지자 아예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독일 마르크에 페그시키는 방식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나서야 겨우 물가가 안정되었다. 한편 무기 금수조치는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전쟁 당사자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절박한 상황에 몰린 보스니아의 알리아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당시 미국과 서방 세계 국가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이들은 현장 관리만 맡는 소규모 군대였고 세르비아계 입장에서는 직접 공격만 안 하면 상관없었기에 전쟁 종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는 고라주데, [[사라예보]], 비하치 세 도시만 점령하면 이제 전쟁은 끝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승리를 확신했으며 실제로 보스니아 공화국의 운명은 무척 위태로웠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65px-Bsa_controlled.png|width=332]] [[1994년]] [[12월]]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에서도 공세로 전환한데다가, [[1993년]] 밴스-오웬 안(아테네 합의)가 파기되면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다보니 [[1994년]] [[10월]] 이후로는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은 영토를 점령하기보다는 점차 크로아티아군의 공격에 밀려나고 있었다. 1995년이 되면서 밀로셰비치가 지원을 중단한 세르비아계의 전력 약화는 눈에 띄는 수준이라, 보스니아 내 [[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5210020910701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5-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2860&publishType=00010|국가 합병]]을 발표해야 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자신들의 점령지 내에 있는 [[보슈냐크인]]을 학살하는 데에만 집중하였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 심각했던 [[인종청소]]가 [[1993년]]~[[1994년]]에는 잠시 주춤하다가 [[1995년]]부터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95년]] [[5월]]이 되자 스릅스카 공화국의 확장판 격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서슬라보니아 지역이 "플래시 작전"으로 크로아티아한테 점령당했고, 이 때에 맞춰서 보스니아 내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군(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수도인 크닌과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도인 [[바냐루카]]를 잇는 [[고속도로]]를 [[1995년]] [[6월]] 점령한다. 그러자 크라이나는 고립되었고, 스릅스카 공화국 서부지역은 원래부터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기에 스릅스카 공화국은 이 지역에 대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지 않던 상태라 크로아티아군의 공격에 비하치로 가는 길이 뻥 뚫려버린다. 그러자 스릅스카 공화국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사라예보 포위전]]을 강화하고 스릅스카 공화국 동부 지역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제파 학살, 고라주데 압박을 강화하는 식으로 동부지역에만 집중했다. 서부 지역은 사실상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방어를 전담시키고 스릅스카 공화국은 아예 서부 지역에 대한 방어를 거의 포기해버렸다. 1995년 6월 초에 시도됐던 마지막 비하치 [[공성전]]도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아닌 크라이나군이 주도해서 시행했을 정도다. [[https://www.youtube.com/watch?v=1Gtdpel1tTI|사라예보 시장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벌어진 참상]]. 피가 낭자하고 두개골로 보이는 뼈 조각이 널브러진 거리의 모습,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간이 병원으로 끊임없이 실려오는 시민들의 모습, 충격을 받고 울부짖는 간호사의 모습이 담겼다. 1995년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사라예보 시장을 폭격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한 이 사건 때문에 국제적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던 것이다. 사라예보는 당시 양측의 경계였고, 전쟁 중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수도라는 등의 이유로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깨지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